
부동산 중개사로 살아온 평범한 일상 속에서, 전통 판각이라는 깊은 세계로 들어선 한 시민의 고백이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현재 경북 김천에서 파크드림 공인중개사로 작은 부동산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민주씨(53)는 1남 1녀의 자녀를 둔 평범한 공인중개사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지인과의 대화는 그의 삶에 작은 균열을 냈다. “판각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나도 한 번 직접 배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그는 곧 판각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불교 수행의 연장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 안준영 각자장(이산책판박물관 관장)이 교육하는 월요일 반에서 판각 작업과 함께 수행을 시작했다.
“실력자들 속에서, 나 자신과의 전쟁을 시작하다”
첫 수업의 분위기는 그에게 적잖은 긴장감을 안겼다. “어렵겠다, 무서운 실력자들이 모였구나, 내가 좀 어린 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업장은 경쟁이나 비교의 공간이 아니었다. 모두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과 마주한 채 칼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이곳은 기술을 겨루는 자리가 아니라 마음을 다듬는 자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노안과 안구건조증, 그리고 첫 성취감
첫날부터 현실적인 어려움도 컸다. 노안과 안구건조증이 있는 그는 “눈이 뻑뻑하고 빠질 것 같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망치와 칼을 맞추며 한 글자 한 글자가 형태를 갖춰가는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취감이 찾아왔다. “글자라는 바탕 위에서 칼과 망치가 하나가 되어 춤을 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인사에서의 판각, 제게는 수행의 연속입니다”
2년 넘게 작은 절에서 마음 공부를 이어오고 있는 A씨에게, 해인사에서의 판각 수업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부처님의 가피로 전통 있는 사찰에 와서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는 판각이 곧 수행입니다.”
“옛 선조들의 혼에, 이번 생에 제가 함께합니다”
이제 겨우 3회차 수업을 마친 그는 아직 기능 습득에 집중하느라 깊은 사유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감정은 남아 있다. “고려대장경을 제작한 옛 선조님들의 혼에, 이번 생에 제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늦은 시작이 아닌, 감사한 선물
“좀 더 어린 나이에 접했다면 전문가의 길로 갈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말을 잇는다.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감사한 선물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렵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판각을 연마하고 있다고 전했다.
AI 시대, 판각은 인간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
A씨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소회도 덧붙였다. “AI가 점점 똑똑해지면서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을성은 줄어들고, 진실함도 결여되는 것 같아요.” 그는 판각이라는 전통 기술이야말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칼과 망치가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의 혼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 간다는 건 엄청난 일입니다. 53년의 세월 중, 판각을 배우기로 한 선택이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느낍니다.”
아직은 서툴고 배울 것도 많지만, 그는 남은 수업 기간 동안 자신만의 속도로 수행을 이어 가고 싶다고 말한다. 기술을 넘어 수행으로, 취미를 넘어 삶의 태도로 이어지는 판각의 길 위에서, 그의 두 번째 인생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
정안뉴스 안정주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