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사찰에서 불교의 삼보(三寶) 가운데 하나인 법보(法寶)는 상대적으로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불상과 전각 중심의 불보, 승려 공동체인 승보에 비해, 경전과 이를 담아온 책판의 보존과 관리에 대한 연구는 드물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박광헌 대구대학교 교수의 연구 「한국 사찰의 판전」은 국내 사찰 판전의 역사적 의미와 계통을 종합적으로 조명한 의미 있는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연구는 2025년 3월, 한국서지학회가 발행하는 서지학연구 제101호(KCI 등재 학술지)에 게재되었으며, 총 23쪽 분량에 걸쳐 한국 사찰 판전의 형성과 전승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고려대장경에서 화엄경까지, 판전의 중심을 따라가다
논문은 먼저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조성된 판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대장경 보관 사찰로 잘 알려진 해인사의 장경판전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부인사 판전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조명하며, 대장경 판전이 단순한 보관 공간이 아니라 국가적·종교적 상징 공간이었음을 짚는다.
이어 『대방광불화엄경소』 120권본 경판을 보관한 송광사와 쌍계사의 화엄전,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소초』 경판이 전승된 징광사·영각사·봉은사로 이어지는 판전의 계통을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판전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건물’이 아니라, 특정 경전 신앙과 교학 전통을 이어온 물적 증거임이 드러난다.
폐사와 이전 속에서 지켜낸 법보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사찰의 폐사나 사세 약화라는 역사적 위기 속에서도 불경 책판을 이전·보관하며 법보 보존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례가 소개된다. 충청 지역의 개심사와 영남 지역의 통도사가 대표적이다.
이들 사찰은 주변 사찰에서 흩어질 위기에 놓인 경판을 수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역 단위의 ‘법보 저장소’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판전이 개별 사찰의 자산을 넘어, 불교 문화 전체의 보존 장치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판전 연구의 현재와 새로운 과제
박광헌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국내 판전에 대한 개괄적 연구의 틀을 제시함과 동시에, 향후 연구 과제도 함께 제안한다. 판전의 건축사적 가치, 경판 이동 경로에 대한 미시적 연구, 지역 간 네트워크 분석 등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는 분야로 지목된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법보는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해석되어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화려한 불전이나 관광 중심의 사찰 인식에서 벗어나, 조용히 경전을 지켜온 판전의 존재를 재조명해야 할 시점이다.
법보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 사찰의 판전은 오랜 세월 전란과 사회 변화 속에서도 불교의 지혜를 지켜온 공간이었다. 이번 연구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판전의 역사와 의의를 정리하며, 법보에 대한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불교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논의하는 오늘, 판전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질문을 요구한다.
우리는 과연 ‘지식과 기록을 어떻게 보존해 왔고, 또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가.
정안뉴스는 앞으로도 기록과 보존, 그리고 그 의미를 잇는 이야기들을 계속 전해 나갈 예정이다.
정안뉴스 안정주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