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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으로 새기는 수행의 시간, 판각으로 이어가는 전통의 가치

"해인사 판각학교에서 배우는 장인정신… 한 글자에 담긴 노력과 불심"
"디지털 시대 속 ‘효율’을 넘어 ‘가치’를 새기는 전통 판각의 의미"



 

태어나서 처음 잡아본 판각용 칼과 망치

2025년 6월부터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진행 중인 판각학교 2기 토요일반에 참여하고 있는 강대술(姜大述, 眞覺) 교수는 2023년에 대학 강단을 내려왔다.

“아내가 몸이 아프면서 치료를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다니고 있던 2023년 10월 무렵이었어요. 재직했던 부산 경성대학교의 한국한자연구소에서 HK+사업으로 ‘전통판각정규강좌’가 개설되면서 현재 해인사 판각학교 2기 안준영 각자장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일반인 몇 분을 포함하여 재직 중인 교수들로 구성되어 진행되었던 판각 강좌에 그는 동료 교수의 추천으로 등록하여 판각이라는 작업을 처음으로 접해 보았다고 한다.

 

천자로 새긴 갑골문이 판각의 세계로 이끌다

“판각 강좌 추천을 받고 처음에는 생애 후반기 취미로 팔자에 없는 목판화도 해보고, 멋진 글씨나 도장도 새겨보면 재미있는 취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렇게 칼과 망치를 잡은 지 벌써 3년차가 되었다고 한다. 강좌 과정 처음에는 그림처럼 생긴 금석문자도 새겨보고 <주해천자문> 음각으로 칼질 기초를 배우고 난 뒤, 부산 판각 수강생들은 이산 안준영(완판본문화관, 이산책판박물관 관장) 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전주 ‘완판본연구회’ 팀과의 합작으로 세계 최초의 32판 <갑골천자문>을 완판하여 출판의 전과정을 경험해 보기도 하였다. 칼끝에서 탄생한 <갑골천자문>은 부산, 전주, 중국에까지 기획 전시를 하면서 강교수는 점차 판각에 매력을 느껴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한다.

 

매주 열심히 수련하는 판각학교 수강생들을 보면서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다

“처음 판각을 시작할 때는 망치가 어떤 것이 좋은지, 칼은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끌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든 도구가 낯섭디다. 가장 어려웠던 점이 칼을 연마하는 일이었어요. 칼을 연마할때 밀고 당기는 각도를 일정하게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칼날이 배가 부르거나, 날이 넘어 다시 갈아야 하기도 하고, 갈아도 갈아도 칼끝은 무뎌져 뾰족해지질 않고 칼 길이만 짧아질 뿐이었어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서 낫도 갈아보고 부엌칼도 갈아봤는데 판각 창칼은 왜 이렇게 갈기가 어려운지, 다른 사람들은 칼을 잘만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소질이 없는 것인지, 어쩔 수 없이 가끔은 잘 가는 분의 수고를 빌리기도 했어요. 이런 고뇌의 시간이 흘러 한 1년쯤 되니 이제 겨우 칼날이 제대로 세워지는 것 같더라구요. 역시 칼 가는 것도 노력의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여야 하나 봐요.”

판각을 배우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직도 글자를 새길 때 깊이와 글자 두께 조절이 쉽지 않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시력이 약해서 정확한 가장자리 선을 따라가지 못해서인 것 같다고 분석한다.

판각 작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점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매주 판각 학교에 오면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된다고 한다.

“해인사 판각 학교에는 전국 각지에서 원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매주 달려와 현재 많은 각수 지망생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판각 기술 수련을 하고 있지요. 모두가 진지하게 망치로 두드려 칼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마음은 불심일까? 진심일까? 물어보고도 싶고, 쉬는 시간 타종이 울려도 망치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어떤 분들은 집에서도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계속해서 판각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돼요. 매주 판각학교에 올 때마다 해이해진 내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고, 동기부여가 됩디다.”

 

목판에 붙인 체본 글자를 따라 한 글자 한 글자씩 새겨가면서 부족했던 불심을 채우다

“해인사라는 공간에서 판각을 배운다는 점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라는 질문에 강 교수는 자신의 부족했던 불심을 채워가는 중이라고 대답한다.

“고려대장경 목판 자체는 대한민국 국보이자 세계 기록유산이잖아요. 이러한 문화유산을 복각하는 목표로 판각 수련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죠. 불자라면 경전을 대할 때도 독송할 때도 불심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나는 얼마만큼의 불심이 채워졌나를 들여다보면 독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더라고요. 경판 글자를 한 글자씩 새겨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부족했던 불심을 채워가고 있어요.”

 

고려대장경은 단순히 불교 경전을 모아놓은 전집이 아니었다

강 교수는 해인사 장경각을 돌아보면 저절로 경건한 마음과 불심이 깊어지는 상징적 의미를 느끼게 된다고 토로한다.

“고려의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탄생하게 된 고려대장경에 약 오천만 자의 경전 글자를 새겨 팔백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보관되어 전해지는 경이로운 사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한 글자 한 글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희생이 서려 있을지 짐작조차 어려웠어요.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국가를 수호하려 했고, 불교의 지식을 집대성했으며, 고려의 목판 제작 기술과 각수(刻手)들의 수준은 세계 최고의 인쇄 문화를 증명했다고 봐요. 따라서 고려대장경은 단순히 불교 경전을 모아놓은 전집을 넘어 고려 시대의 문화적 역량과 국난극복의 의지가 집약된 인류학적 유산으로서 길이길이 보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땀 흘린 노력은 대장경 복각을 해낼 수 있는 진정한 각수(刻手)가 될 수 있을 것

칼끝으로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판각은 목판에 칼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일이지만 칼끝만으로는 전통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는 어렵다고 그는 말한다. 칼끝의 기술에 정성 어린 마음의 혼을 담아 새겨야 진정한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고려대장경을 새겼던 각수들도 그랬으리라고 말한다.

“시인 나태주의 <풀꽃>은 짧은 시구에 관찰자의 함축된 마음을 담고 있지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런데 내가 판각해놓은 결과물을 보면 <풀꽃>과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엉망이고, 오래 보면 실망스러운 생각이 들어요. 그게 현재 나의 판각 수준인 것 같아요. 고려대장경을 새겼던 각수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겠죠?. 더욱더 많은 땀을 흘리며 노력해야죠. 그래야 진정한 전통의 맥을 이어 대장경 복각을 해내는 진정한 각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판각을 하면 집중이 잘 되고 잡념이 사라져서 좋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을 담아 새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디지털이 ‘효율성’을 지향한다면 전통 판각 기술은 ‘가치’를 지향한다

칼과 망치로 목판에 판각을 한다고 하면 어떤 이는 3D프린터 시대에 왜 비효율적인 방법을 배우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판각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에 대한 강 교수의 생각을 듣기 위해 “디지털 시대에 판각 같은 전통 기술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을 해보았다.

“간단해요. 디지털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효율성’을 지향하는 반면, 전통 판각 기술은 대체 불가능성을 지닌 ‘가치’를 지향하지요.”

그가 생각하는 ‘가치’는 장인 정신과 영속성, 희소성과 깊이에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 모든 것이 비트(bit)와 픽셀(pixel)로 변환되는 상황에서 판각과 같은 전통 기술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는 중요한 가치가 있지요. 기록의 영속성은 물론, 칼끝으로 나무에 새긴 글자는 물리적인 깊이뿐만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기록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속도나 효율성만을 극대화하는 디지털보다는 ‘느림’을 통한 정신적 수행의 시간도 된다고 봐요. 디지털이 어떤 전자적 정보 전달을 빠르게 한다고 하면, 판각은 느리지만 가치를 새긴다고 할 수 있어요. 마치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요? 판각은 본질적인 기록의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판각 기술 수련은 여럿이 함께해야 롱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산 경성대학교에서 ‘전통판각정규강좌’ 수업을 할 때마다 교실 뒤쪽으로 항상 4명이 앉아서 판각 연습을 하곤 하였다. 그때부터 그 4인방을 ‘F4’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과정 이후에도 ‘F4’는 함양에서 ‘전통판각전문가과정’ 이수. 전주 ‘완판본연구회’와의 교류, 현재 ‘해인사판각학교’까지 먼 길을 매주 함께하고 있다.

“근래에는 부산에서 해인사판각학교에 다니는 수련 각수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날을 대비해 우선 ‘F4’는 아담한 작업실(‘호고재’ 접살이)을 마련하고 매주 한 번씩 만나 함께 판각 연습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며. 차도 마시고, 막걸리도 마시며 팀워크를 돈독히 해오고 있지요. 최근에는 ‘대장경문화학교 부산지부’ 격으로 ‘낙동판각연구회’를 발족하고 부산, 양산, 울산, 김해 등 인근 지역 각수들과의 연합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판각 기술 수련은 지역별로 연합을 하든 친분이 있는 분들끼리 모이든 팀을 이루어 함께해야 경쟁력도 생기고,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이 멀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중도 포기의 위기 때마다 서로 마음을 나누며 동기부여가 되어 오늘까지 계속할 수가 있었으니까요. 서로 경쟁도 하고, 요령도 배우며 성장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판각 기능 수련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팀플레이가 중요하다고 강교수는 힘주어 말한다.



정안뉴스 안정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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